키 크는 곳

ellyfly.egloos.com

포토로그

조금씩 자라고 있어요.
by 160cm


그 여자를 위해서 어디론가 마냥 달리고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.


 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여자의 눈이 깜빡거리며 내 눈을 빤히 응시했다. 비행기 안에서처럼, 비처녀(非妻女)를 감춰주느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 나를 바라보던 첫날밤처럼. 그렇다, 이 여자가 저런 눈이 될 때마다 우리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곤 했던 것이다. 자.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?
 갑자기 그 여자의 한쪽 콧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. 호주머니를 뒤졌으나 내 호주머니 속에 손수건 따위가 있을 리 없다.
"고개를 젖혀."
손을 가져가려 하자 그 여자의 음성이 쇳소리를 냈다.
"손대지 말아요."
방송극의 대사처럼 그것은 평범한 음색이 아니었다.
"잠깐 고개를 젖히고 있어."
 나는 약솜을 사기 위해 주차장 건너편에 있는 약방으로 달려갔다. 그 여자를 위해서 어디론가 마냥 달리고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. 달리고 있는 몸에 썩은 감정들이 달라붙을 자리는 없을 것이다. 그러나 약솜을 사가지고 왔을 때 그 여자는 없었다. 찢어진 통장의 종이 조각들만 마음의 쓰라린 파편으로서 땅바닥에 널려져 있었다. 나 역시 그 여자와의 완전무결한 몌별(袂別)을 처음으로 실감했다. 증오의 고통도 함께 찢겨져버린 것이다.

김승옥, 서울의 달빛 0장 중

덧글

댓글 입력 영역